Ch4. 한국사능력검정 — 조선시대 후기: 붕당과 탕평
임진왜란 (1592~1598)
전쟁의 발발과 전개
1592년 4월, 일본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면서 임진왜란이 시작되었습니다. 조선 조정의 안이한 대비와 일본군의 신식 조총 전술에 일격을 당한 조선 관군은 개전 초 연패를 거듭하였습니다.
| 시기 | 사건 | 내용 |
|---|---|---|
| 1592년 4월 | 왜군 상륙(부산진) | 부산첨사 정발 전사 |
| 1592년 5~6월 | 한양·평양 함락 | 선조 의주 피란 |
| 1592년 7월 | 한산도 대첩 | 이순신, 학익진으로 왜 수군 대파 |
| 1592년 | 진주대첩 | 김시민, 진주성 수성 성공 |
| 1593년 | 행주대첩 | 권율, 행주산성 대첩 |
| 1597년 | 정유재란 | 일본 재침 |
| 1597년 | 명량대첩 | 이순신, 12척으로 133척 격파 |
| 1598년 | 전쟁 종결 | 도요토미 사망, 왜군 철수, 노량해전 |
이순신의 3대 해전
- 한산도 대첩(1592): 학익진 전술로 왜 수군 주력 격파. 제해권 장악
- 명량대첩(1597): 12척의 배로 133척을 격파. 세계 해전사의 기적
- 노량해전(1598): 퇴각하는 왜군 격멸, 이순신 전사
의병과 비변사
의병: 전국 각지에서 자발적으로 일어난 민간 군사 조직. 곽재우(홍의장군), 조헌, 고경명, 유정(사명당) 등이 활약. 향토 지리에 밝은 게릴라 전술로 왜군을 괴롭혔습니다.
비변사: 원래 왜구·여진 방어를 위해 설치된 임시 기구였으나, 임진왜란을 거치며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기관으로 변모하였습니다. 이후 세도정치기까지 조선 최고 권력 기관으로 기능합니다.
임진왜란의 결과
| 결과 | 내용 |
|---|---|
| 조선 | 인구·농토 격감, 문화재 소실, 비변사 권한 강화 |
| 일본 | 도쿠가와 이에야스 집권, 에도 막부 수립, 문화 발전(도자기 기술 등) |
| 명 | 전쟁 참전으로 국력 소진 → 후금(청)의 성장 빌미 |
병자호란 (1636~1637)과 북벌론
광해군의 중립 외교
임진왜란 이후 명나라가 쇠퇴하고 여진족이 세운 후금(後金, 뒤에 청)이 강성해지자, 광해군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실리적 중립 외교를 추진하였습니다. 명의 요청으로 파병된 조선군에게 상황에 따라 유연하게 대처하도록 한 것이 대표적입니다.
인조반정과 정묘·병자호란
광해군의 외교 노선은 서인 세력의 반발을 샀고, 1623년 인조반정으로 광해군이 폐위되고 인조가 즉위하였습니다. 인조는 친명배금(親明排金) 정책을 펼쳤습니다.
| 사건 | 연도 | 내용 |
|---|---|---|
| 정묘호란 | 1627년 | 후금 침입, 형제 관계 체결로 화의 |
| 병자호란 | 1636~1637년 | 청 침입, 인조 남한산성 항전 |
| 삼전도의 굴욕 | 1637년 | 인조, 청 태종에게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 |
삼전도의 굴욕: 인조가 한강 남쪽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조아리는 치욕적인 항복 의식.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이 인질로 끌려감.
북벌론
병자호란 이후 효종(봉림대군)은 청에 대한 복수와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북벌론을 추진하였습니다. 송시열 등 서인이 지지하였으나, 현실적인 국력 부족과 청의 강성함으로 실현되지 못했습니다.
붕당정치
붕당의 형성
붕당(朋黨)이란 학문적·정치적 이념을 공유하는 사림의 정치 집단입니다. 선조 때 이조전랑 임명 문제로 동인과 서인이 분열하면서 본격적인 붕당정치가 시작되었습니다.
붕당의 분화 과정
동인(1575) → 북인 (광해군 대 집권)
남인 (이황 계열)
서인(1575) → 노론 (송시열 계열)
소론 (윤증 계열)
| 붕당 | 특징 |
|---|---|
| 동인 | 이조전랑직 양보 반대. 이황·조식 계열 |
| 서인 | 이이·성혼 계열 |
| 북인 | 광해군 집권기 실세. 광해군 폐위 후 몰락 |
| 남인 | 이황 계열. 예송논쟁 등에서 서인과 대립 |
| 노론 | 서인에서 분화, 송시열 중심. 숙종~영조 대 주도 |
| 소론 | 서인에서 분화, 윤증 중심. 노론에 반대 |
예송논쟁
현종 때 효종이 사망하자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가 상복을 얼마나 입어야 하는지를 둘러싼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이는 단순한 예절 문제가 아니라 왕권과 붕당 간의 정치적 대립이었습니다.
| 구분 | 서인 주장 | 남인 주장 | 결과 |
|---|---|---|---|
| 1차 예송(1659년) | 1년 복 | 3년 복 | 서인 승리 |
| 2차 예송(1674년) | 9개월 복 | 1년 복 | 남인 승리 |
영조의 탕평책
영조(재위 1724~1776)와 완론탕평
붕당 간의 극심한 대립을 해소하기 위해 영조는 탕평책을 실시하였습니다. 영조의 탕평은 완론탕평이라고 불리는데, 각 붕당에서 온건한 인물들을 골고루 등용하는 방식이었습니다.
| 정책 | 내용 |
|---|---|
| 탕평비 건립 | 성균관 입구에 탕평의 뜻을 새긴 비석 세움 |
| 탕평파 육성 | 붕당에 치우치지 않는 탕평파 인물 중용 |
| 이조전랑 권한 약화 | 붕당 갈등의 핵심이던 이조전랑의 청요직 인사권 축소 |
| 서원 정리 | 붕당의 근거지인 서원을 대거 철폐 |
| 균역법(1750년) | 군포를 2필에서 1필로 감소, 부족분은 결작·어염세로 충당 |
영조의 사도세자 문제
영조는 아들 사도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이는(임오화변, 1762년) 비극적 사건을 일으켰습니다. 이는 탕평책의 한계와 노론의 정치적 음모가 얽힌 사건으로, 이후 정조 시대의 정치 갈등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정조의 탕평책과 개혁
정조(재위 1776~1800)와 준론탕평
정조는 영조의 탕평책을 더욱 강화하여 준론탕평을 실시하였습니다. 준론탕평이란 이해에 따라 붕당을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의리와 명분에 따라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는 더 적극적인 탕평 방식이었습니다.
| 정책 | 내용 |
|---|---|
| 규장각 설치(1776년) | 학술 연구 기관 겸 왕권 강화 기구. 유능한 인재 육성 |
| 초계문신제 | 젊은 관리를 규장각에서 재교육 — 친왕파 양성 |
| 화성(수원) 건설 |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이전, 신도시 건설 |
| 장용영 설치 | 왕의 친위 군대 — 군사적 왕권 강화 |
| 신해통공(1791년) |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 상인의 금난전권 폐지 → 자유 상업 촉진 |
| 서얼 허통 | 서얼 출신도 규장각 검서관으로 등용 (박제가·이덕무 등) |
규장각: 겉으로는 도서관·학술 기관이나, 실질적으로는 탕평·개혁을 추진하는 왕의 싱크탱크 역할. 정약용·박제가·이덕무 등 실학자들이 활동하였습니다.
화성: 정조가 아버지 사도세자를 기리며 건설한 계획 신도시. 정약용이 거중기 등 새 기술을 활용하여 건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실학 사상
실학의 등장 배경
17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임진왜란·병자호란의 후유증으로 경제가 피폐해지고 사회 모순이 심화되었습니다. 이에 성리학 일변도의 학풍을 비판하고 실용적 학문을 추구하는 **실학(實學)**이 등장하였습니다.
실학의 두 계열
중농학파 (경세치용 학파)
농업과 토지 제도 개혁에 집중한 계열입니다.
| 학자 | 주요 저서 | 핵심 주장 |
|---|---|---|
| 유형원 | 『반계수록』 | 균전론: 신분에 따라 토지 균등 배분 |
| 이익 | 『성호사설』 | 한전론: 영업전(생계 최소 토지) 외 매매 금지 |
| 정약용 | 『목민심서』『경세유표』『흠흠신서』 | 여전론: 마을 단위 공동 경작·공동 분배 |
중상학파 (이용후생 학파)
상공업 진흥과 기술 도입을 강조한 계열입니다.
| 학자 | 주요 저서 | 핵심 주장 |
|---|---|---|
| 유수원 | 『우서』 | 상공업 진흥, 사농공상 차별 타파 |
| 홍대용 | 『의산문답』 | 지구 자전론, 성리학 비판, 기술 혁신 |
| 박지원 | 『열하일기』 | 청나라 문물 수용 주장(북학론), 수레·선박 이용 강조 |
| 박제가 | 『북학의』 | 적극적 청나라 문물 수용, 소비 촉진론 |
정약용(丁若鏞, 1762~1836): 실학을 집대성한 인물. 목민심서(지방관 행정 지침), 경세유표(국가 제도 개혁론), 흠흠신서(형사법 개론) — 이른바 ‘1표2서’. 수원 화성 건설에 거중기를 설계하여 기여.
대동법과 균역법
대동법 (1608~1708)
대동법은 기존의 공납(특산물 납부) 제도를 폐지하고, 토지 면적에 따라 쌀(또는 베·동전)로 납부하는 제도입니다.
| 항목 | 내용 |
|---|---|
| 시행 시작 | 광해군 원년(1608년), 경기도부터 시작 |
| 전국 확대 | 숙종 34년(1708년) 함경·평안도 제외 전국 완성 — 100년 걸림 |
| 납부 방식 | 토지 1결당 쌀 12두(또는 베·동전) |
| 의의 | 방납의 폐단 해결, 공인(貢人) 등장, 상품화폐경제 발달 |
방납의 폐단: 중간 상인(방납인)이 특산물을 대납하면서 폭리를 취하던 폐습. 대동법으로 공납 대신 쌀을 내게 하여 해결.
공인(貢人): 대동법 시행 후 등장한 어용 상인. 관청의 필요 물자를 구매·납품. 조선 후기 상품경제 발달의 핵심 주체.
균역법 (1750)
영조가 실시한 군포 개혁 제도입니다. 기존에 2필이던 군포를 1필로 반감하고, 부족한 재정은 결작(토지세 추가), 선무군관포, 어염세 등으로 보충하였습니다.
조선 후기 사회 변화
신분제의 동요
조선 후기 상품경제 발달과 전란으로 인한 혼란으로 신분제가 흔들리기 시작하였습니다.
- 공명첩: 국가가 재정 확보를 위해 돈을 받고 관직 명칭을 기재한 빈 문서를 판매. 양민이 돈으로 양반 신분 취득 가능
- 향반·잔반: 몰락한 양반. 경제적으로는 평민과 다름없이 생활
- 노비 해방: 노비 수 감소. 순조 원년(1801년) 공노비 6만 6천여 명 해방
상품화폐경제의 발달
- 상평통보(1678년 이후): 전국적으로 유통되는 동전. 화폐경제 보급
- 사상(私商)의 성장: 금난전권을 뚫고 성장한 민간 상인. 경강상인·만상·내상 등
- 장시(場市): 5일장을 중심으로 전국에 확산. 18세기 1000여 개소 형성
주요 연표
| 연도 | 사건 | 의의 |
|---|---|---|
| 1592년 | 임진왜란 발발 | 7년 전쟁, 조선 전토 피해 |
| 1608년 | 대동법 시행(경기도) | 공납제 개혁 시작 |
| 1623년 | 인조반정 | 광해군 폐위, 서인 집권 |
| 1636년 | 병자호란 | 삼전도의 굴욕 |
| 1659년 | 1차 예송논쟁 | 서인 승리 |
| 1674년 | 2차 예송논쟁 | 남인 승리 |
| 1708년 | 대동법 전국 완성 | 100년 만에 함경·평안도 제외 완성 |
| 1724년 | 영조 즉위 | 탕평책(완론탕평) 시작 |
| 1750년 | 균역법 시행 | 군포 2필→1필 |
| 1762년 | 임오화변(사도세자 사망) | 영조, 아들을 뒤주에 가두어 죽임 |
| 1776년 | 정조 즉위, 규장각 설치 | 준론탕평·개혁 본격화 |
| 1791년 | 신해통공 | 금난전권 폐지, 자유 상업 |
| 1800년 | 정조 사망 | 세도정치 시작 |
핵심 개념 카드
임진왜란 3대 대첩 ★★★★★
: 한산도(1592, 학익진) · 행주(1593, 권율) · 명량(1597, 12척 vs 133척).
암기 포인트: “한행명” — 한산·행주·명량
붕당 분화 계보 ★★★★★
: 동인(이황계·조식계) → 남인·북인 / 서인(이이·성혼계) → 노론·소론.
암기 포인트: 동→남북, 서→노소
영조 vs 정조 탕평 ★★★★★
: 영조=완론탕평(온건파 골고루), 정조=준론탕평(의리·명분 중심). 영조=균역법, 정조=규장각·화성·신해통공.
암기 포인트: 영조=완(완전히 섞음), 정조=준(기준이 있음)
대동법의 핵심 ★★★★★
: 공납(특산물) → 쌀·베·동전(토지 1결당). 1608년 경기도 시작 → 1708년 전국. 방납 폐단 해결, 공인 등장.
암기 포인트: 대동법=100년짜리 개혁
실학 양대 계열 ★★★★☆
: 중농학파(유형원→이익→정약용, 토지개혁) vs 중상학파(홍대용·박지원·박제가, 상공업 진흥·북학).
암기 포인트: 중농=농사·토지, 중상=상업·기술
실전 퀴즈
Q1. 임진왜란이 조선 사회에 끼친 영향을 3가지 측면에서 서술하시오.
정답: ① 경제적 피해: 전 국토의 황폐화로 경작지와 인구가 급감하여 국가 재정이 크게 타격을 입었다. ② 정치 제도 변화: 비변사가 임시 기구에서 국정 전반을 총괄하는 최고 기관으로 격상되어 의정부·6조 체계가 유명무실해졌다. ③ 신분제 변동: 전란 중 군공을 세워 신분을 높이거나, 국가가 재정 확충을 위해 공명첩을 판매함으로써 신분 이동이 활발해졌다.
Q2. 대동법의 시행 배경, 내용, 의의를 서술하시오.
정답: (배경) 기존 공납 제도에서 방납인이 중간에 개입해 폭리를 취하는 방납의 폐단이 심각해졌다. (내용) 광해군 원년(1608년) 경기도를 시작으로 토지 1결당 쌀 12두를 납부하도록 하여 공납을 대체하였으며, 1708년 숙종 대에 함경·평안도를 제외한 전국으로 확대되었다. (의의) ① 방납의 폐단이 해소되고 백성의 부담이 경감되었다. ② 공인(어용 상인)이 등장하여 상품화폐경제가 발달하는 계기가 되었다. ③ 토지 소유량에 따른 과세로 세금 부담의 형평성이 개선되었다.
Q3. 영조의 탕평책과 정조의 탕평책의 차이를 서술하시오.
정답: 영조의 탕평은 ‘완론탕평’으로, 노론·소론·남인 등 각 붕당에서 온건한 인물들을 고루 등용하는 방식이었다. 붕당 간 화합을 유도하되 기존 붕당 구조는 유지하였으며, 탕평비 건립과 이조전랑 권한 약화를 통해 붕당 갈등을 완화하려 하였다. 정조의 탕평은 ‘준론탕평’으로, 의리와 명분에 따라 옳고 그름을 가리는 더 적극적인 방식이었다. 정조는 규장각을 설치하여 실력 있는 인재를 직접 육성하고, 초계문신제를 통해 친왕파를 양성하며, 장용영으로 군사력을 확보하는 등 왕권을 실질적으로 강화하였다.
Q4. 조선 후기 실학의 등장 배경과 중농학파·중상학파의 차이를 서술하시오.
정답: (등장 배경) 임진왜란·병자호란으로 농토와 인구가 크게 줄고 사회 모순이 심화된 반면, 지배층은 성리학적 명분 논쟁에만 매달렸다. 이에 현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실용적 학문인 실학이 등장하였다. (중농학파) 유형원·이익·정약용 등을 중심으로 토지 제도 개혁을 통한 농민 생활 안정을 추구하였다. 유형원의 균전론, 이익의 한전론, 정약용의 여전론이 대표적이다. (중상학파) 홍대용·박지원·박제가 등을 중심으로 상공업 진흥과 청나라 문물 수용(북학)을 주장하였다. 기술 혁신과 자유로운 상업 활동을 통한 국가 부강을 목표로 하였다.
Q5. 정조의 화성(수원성) 건설의 목적과 의의를 서술하시오.
정답: (목적)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능을 수원으로 이전하고, 수원에 새로운 신도시 화성을 건설하였다. 표면적으로는 부친에 대한 효도였으나, 실질적으로는 ① 수원을 새로운 정치적 거점으로 삼아 노론 중심의 한양 정계를 견제하고, ② 장용영의 외영을 수원에 두어 군사적 기반을 다지며, ③ 상업 도시로 육성하여 왕권의 경제적 기반을 강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다. (의의) 정약용이 설계에 참여하여 거중기·녹로 등 새 기계를 활용해 건설 기간을 단축하고 백성의 노역 부담을 줄였다. 화성은 동양 성곽 건축의 정수로 평가되며,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되어 있다.
OIYO 편집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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